외국인들이 한국음식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여러가지지만
그 가운데 묵도 있단다.
다람쥐들이나 먹는 도토리를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게 도무지 납득이 안된다는
그런 얘기다. 피장파장이니 달리
언급할 필요는 없을 일이다.
어릴적 겨울밤이면 찹쌀떡 메밀묵을
팔러다니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던
기억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씩
불러 사오면 어른들은 묵만 드시고
나는 떡만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이제는 간단한 재료로도 다양한 요리기술과
조합으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낸다. 그 중 김과 버무린 묵무침도
가끔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 되었다.
6.25때 남편이 전사해 딸하나 아들하나를
두고 청상과부가 된 아낙이 있었다.
근동의 제법 위세가 있던 가문으로
시집을 간 덕분인지 나라의 도움인지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아이들을 키워냈다.
공장을 퇴직할 무렵 번듯한 회사에 다니던
막내 남동생이 근처로 이사를 왔다.
딸은 시집을 보냈지만 무위도식하는
장성한 아들을 돌봐야했기에 아낙은
묵을 쒀 내다 팔며 입에 풀칠을 했다.
그 삶의 피폐함과 고단했음은 미루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니 본인의
스트레스는 오죽했겠는가......
묵을 팔고나면 남동생 집에 들러
올케가 내놓은 소주한병으로 지난간 것과
현재, 다가올 한을 풀어놓고 가곤했다.
착한 올케는 그 고단한 삶을 아는지라
늘 소주를 준비했고 아낙은 매일 소주를
들이키다 취하면 울고불고하다 그렇게
조카의 부축을 받거나 등에 업혀 집으로
가곤 했다.
때론 일찍 귀가한 성질이 불같은 남동생한테
혼쭐이 나 쫓겨가고 술을 장만한 올캐는
몸도 허약한 누나한테 왜 술을 주느냐며
남편한테 타박을 받기도 했다.
언젠가부터는 꺼이꺼이 울다가도
일찍 퇴근하는 남동생 발소리가 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일도 아무짓도
않한듯 툴툴털고 나가기도 했다.
아낙의 묵쑤는 광경을 구경한적 있고
거들기도 했는데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조그만 아낙이 무슨 연으로 이리 고생을
하는지 어린 조카의 눈에도 박복한 삶이
안쓰럽기가 여간한게 아니었다.
어렵사리 아들은 장가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낙은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찬으로 나온 김과 버무린 짭짤한 묵 무침을
보고 생각난 과거의 일이다.
내 고모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