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공경이건 겸손이건
진심이건 농담이건 그 무엇이 되었건
도가 넘치면 모자라거나 아니함만 못함을
일깨워주는 말로 널리 쓰임새가 많은 말이다.
과잉친절은 진의를 의심받게 되고
지나친 농담은 설화를 불러오고
너무 오랜 침묵은 무언의 항의가 되기보다
쓸데없는 또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쳐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행동양식이
되기가 십상이다.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도 진실해 보이지 않는
예의로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글귀로 경고한다.
스크루지와 같은 구두쇠도, 밥 한숟갈 굴비눈팅
한번의 자린고비도 과유불급의 예로
다 주위를 불편하게 만드는 언행들이다.
아침목욕 시간을 잘 못맞추면
과유가 불급한 어른을 만나게 된다.
70대초반을 무색케 할 훤칠한 키에
귀공자 타입의 어른은 목욕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세군데 탕을 다 돌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인사와 안부를 건넨다.
건네는 사람도 받는 우리도 기분이 좋고
즐거운 맘으로 화답하게된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당연하다.
다음은 목욕탕의 어지러진 물바가지와
의자들을 빠짐없이 정리한다.
업소에서 할 일이지만 나 또한 오고가는데
걸리적거리면 직접 정리를 하곤하니
여기까지는 과하다 할 수 없다.
다음부터가 문제다.
샤워기 앞 10개가 넘는 거울을
비누거품을 낸 샤워타올로 다 닦는다.
머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봉사로 여겨
견딜만 하지만 샤워를 하고 있으면
샤워타올을 뺏어 내 등을 닦아주는데는
왜 이러시나 싶을때가 많다.
그럴수 있다 치자.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자기 목욕을 제쳐두고 따라나와
모든 사람들의 등을 스킨과 로션으로
발라준다. 말릴 틈도 없다.
미안함으로 만류하고 웃어넘기지만
고마운 맘보다 뭔가 당하는 느낌이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내가 보수골통이라 칭하는 목사가 있다.
그가 또는 그들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이해는 물론 동의 할수 없는 그 목사의
설교집회를 따라 서울을 밤낮으로 다닌다는
주위의 수근거림과 좀 과하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포섭하려는 숨겨진
열정이 그런 행동으로 나오는게 아닐까
씁쓸한 마음이 드는건 나의 과한 반응일까.....
진의를 잘못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 과한거는 명확해 보이고 더해
내가 불편을 느끼게 되니 시간을
잘 맞춰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